지역: 경북 경주
제목: 호원사 이야기

신라 원성왕(元聖王 38대) 때의 일이다. 신라의 풍속에 해마다 음력 3월 초파일부터 15일까지에 여러 남녀가 경주 흥륜사(興輪寺)에 모여서 전탑(殿塔)을 돌면서, 복회(福會)를 하였는데, 이 때 김 현이라는 한 청년이 있어, 밤이 깊도록 혼자 이 전탑을 돌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홀연히 한 아름다운 처녀가 염불을 하며 같이 탑을 돌고 있는 것이다. 둘은 눈짓을 주고 받다가 어느새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서 그 여자가 돌아 갈 때, 김 현은 따라 가고자 하였고, 그 처녀가 사양하여 막았으나 김 현은 듣지 않고 억지로 따라 가서 그 여자의 집까지 이르렀는데, 그 곳은 서쪽 독산의 한 모퉁이었다.

집은 띳막이었는데, 집 안에는 그 처녀의 어머니 같은 한 노파가 있을 뿐이었다. 노파가 남자의 모양을 바라 보고 처녀에게 "따라온 이가 누구냐?" 고 묻자, 처녀는 사실대로 그 사정을 말하였고, 노파는"비록 좋은 일이나, 없는 이만 같지 못하다. 그러나 저지런 일이라 하는 수 없다. 그렇지만 너의 형과 아우의 악함이 두려우니 아직 남 모르는 곳에 감추어 두어야 될 것이다." 하고 김 현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두었다.조금 있으니 문 앞에서 범 세마리가 으러렁거리며 와서는 사람의 소리를 하며"아! 무슨 비린내야! 요기하기 좋구나!" 하니 노파와 처녀가"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너희들 코가 막혔느냐?" 하고 꾸짖으니 마침 그 때 하늘에서 부르기를,

"너희들이 물건과 생명을 헤치는 것이 더욱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징계하겠다. 하자, 세 범이 듣고 모두 두려워하므로 처녀가 이르기를,"세 형이 모두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자중하시오. 그러면 내가 그 벌을 대신하여 받겠소." 하니 세 범이 기뻐하여 머리를 끄떡이며 꼬리를 치면서 어디로인지 달아나 버렸다.처녀가 들어와 김 현에게 말하기를,"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욕되고 또한 부끄러워 거절하였으나, 이제는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제가 비록 유는 다를지라도 낭군에게 하루 저녁 사랑의 즐거움을 얻고 또한 의를 맺어 중하기는 하나, 세 형의 악한 것을 하늘이 이미 싫어하시매,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고자 하오니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낭군의 칼 아래에 엎드려 죽어서 덕을 갚고자 하옵니다. 제가 내일 저자에 들어가서 물건과 사람들을 헤치면 나랏사람이 어찌 할 수 없어, 왕이 반드시 높은 벼슬을 주어 저를 잡으라고 할 것이오니, 그 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이 숲 속으로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다.김 현이 이 말을 듣고 처녀더러 이르기를,

"사람이 사람을 사귐은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요, 다른 유와 사귐은 대개 비상한 일이지마는 이미 조용히 만난 것은 참으로 하늘이 준 행복이니, 벼슬과 봉급을 얻고자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팔 수는 없소." 하자 그 처녀는"낭군은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 이제 저의 목숨은 대개 천부의 명령이요, 또한 저의 소원이오며, 낭군의 경사요 우리 겨레의 복이매 나랏사람의 기뻐하는 바입니다. 제가 죽으면 다섯 가지 이로움을 갖추는 일이니 어찌 어기겠습니까? 제가 죽은 뒤에는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세워서 진전(眞詮)을 강하여 승복(勝服)에 도움이 되면 낭군의 은혜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서로 울며 작별을 하였다. 그 이튿날 과연 한 마리의 사나운 범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과 물건을 해하므로 국왕이 이를 듣고 범을 잡는 이에게는 벼슬 2급을 준다는 영을 내리었다.

김 현이 허리에 칼을 차고 성 북쪽 숲으로 들어 가니, 과연 범은 어젯밤 본대로 처녀로 변하여 얼굴에는 기쁜 빛을 띠우고 반가이 웃으며 하는 말이"어젯밤에 낭군과 같이 하던 말을 부디 잊지 마시고 오늘 저의 발톱에 할퀴어 상한 사람은 모두 홍륜사의 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螺鉢) 소리를 듣게 하면 나을 것입니다." 하고 김 현의 허리에 찬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잠시 후 지금까지의 아름다운 자태는 변하여 한 마리의 범이 되었다. 김 현이 숲 속에서 나와 외치기를, "내가 지금 범을 잡았다." 하고 그 연유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다만 가르친대로 상처난 이를 치료하게 하여 모두 그 창상이 나았다. 김 현은 범을 잡은 공에 의하여 등용 되었고, 서천 냇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이름 짓고 항상 범강경(梵綱經)을 외며 그 범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